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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기!] 시티투어 버스가 들려주는 빛고을 100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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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양림동 펭귄마을. [사진 제공 = 쥬스컴퍼니]

1930년대부터 2030년, 광주광역시의 100년 이야기를 2시간30분 만에 훑는 이색 투어가 생겼다. '빨간 벽돌 건물 늘어선 고즈넉한 구도심 정도 걷겠지'라고 생각했다가 뒤통수 세게 맞았다. 입담 좋고 발성 훌륭한 배우가 시대에 걸맞은 복장을 갖추고 선봉에 선다. 처음엔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에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빵빵 터지는 농담으로 시작해 마지막엔 눈물 콧물 쏙 빼는 한 편의 뮤지컬을 몸소 경험하고 난 후 광주는 달라 보였다. 광주라는 시대적, 역사적, 그리고 공간적 배경을 십분 살린 시티투어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를 소개한다. 영화와 소설 등 미디어를 통해 배웠던 지식이 실제 광주를 배경으로 되살아나는 진귀한 시간 여행이라고 감히 말한다.

◆ 개화기, 일제강점기 양림동에서는

버스에 오르자 진분홍 유니폼을 입은 버스 안내양 '나비'가 맞아줬다. 나비 역할을 맡은 이혜원 씨의 본업은 배우다.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무미건조한 대사도 맛깔나게 살린다.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는 뮤지컬 형식을 입힌 독특한 스토리텔링 상품이다. 가이드이자 여자 주인공 '나비'와 남자 주인공 '폴'이 두 시간 반 동안 광주의 대표 명소를 무대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광주 시내를 화려하게 치장된 스토리버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광주천을 따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야구장, 광주극장을 차례차례 지날 때면 버스 안 화면에선 각각의 장소를 설명해주는 시청각 자료가 나왔다. 여기에 가이드의 설명이 얹어지는 방식이다.

첫 목적지는 양림쌀롱 여행자라운지. 차 한잔씩 하면서 라운지를 둘러보고 있는데, 개화기 모던걸 차림으로 갈아입은 나비가 등장했다. 투어가 시작하고 30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남자 주인공 폴. 건들건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폴은 나비에게 추근거리는 동네 청년이다. 한 손에 피리를 든 그는 말 그대로 '풍각쟁이'(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해 돈을 버는 사람)다. 폴은 오늘도 나비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러던 중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 통화를 마친 폴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사라졌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폴이 신경 쓰인다. 궁금증을 뒤로하고 양림동 투어를 계속했다. "1930년대 그랜드피아노가 있었을 정도로 부유했던 집이에요. 귀한 참기름 냄새가 일 년 내내 풍겼다고 합니다." 가을비로 한층 분위기를 더한 이장우 가옥에 들렀다. 1989년에 광주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이장우 가옥은 1899년 세워진 전통가옥으로 조선 말기 상류층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똑똑똑' 규칙적으로 빗방울을 떨구는 처마 밑에 모여 설명을 듣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이드 나비의 입담에 한바탕 웃고 있는데 다시 폴이 등장했다. 이번엔 복면 차림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순사에게 쫓기고 있다는 폴은 나비에게 전해달라며 편지 하나를 두고 다시 자리를 떴다.

어느새 폴의 신변을 걱정할 정도로 두 사람의 상황극에 푹 빠져들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양림동 골목길과 가을비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연기력, 삼박자가 완벽하게 버무려진 상황극에 처음 느꼈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폴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대사를 곱씹으며 양림교회에 도착했다. 1904년 창립된 양림교회 옆엔 선교사 오웬을 기리기 위한 오웬기념각이 있다.

1900년대 초 호남의 중심도시는 나주였다. 파란 눈의 선교사들은 맨 처음 나주에 들어왔지만 유림들의 세를 못 이겨 목포를 거쳐 광주 양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선교사들은 교회·학교·병원 등을 세워 봉사의 뜻을 이어 나갔고 일제강점기에 저항운동도 함께했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한 선교사도 여럿이다.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는 오웬기념각 앞에서 나비와 폴이 재회했다. 폴은 독립운동가라며 자신의 정체를 밝힌 다음 나비에게 이별을 고한다. 중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며 떠나간 폴. 그렇게 젊은 청춘의 운명이 어긋났다. 슬픈 사랑 고백을 담은 공연이 막을 내렸고 두 남녀를 지켜보던 일행도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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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 이장우 가옥에서 연기를 펼치는 장면. [사진 제공 = 쥬스컴퍼니]

◆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지금 내리실 곳은 1980년 5월 17일입니다. 동지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모두 함께 힘이 되어 주세요." 비장한 멘트 한마디에 다시 한번 시간을 점프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앞서 나가는 나비와 폴을 따라 오월광장 분수대 쪽으로 향했다.

분수대 근처 발언의 광장, 희생자들의 시신을 임시 안치했던 상무관, 헬기 사격으로 인한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 대공분실이 있던 곳에 세운 '민주의 종각'까지 전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오월광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다. 하얗게 칠해진 옛 전남도청 건물 앞에서 폴과 나비는 재회한다. 나비는 민주 열사로 환생한 폴을 한눈에 알아보지만 두 청춘은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 구성진 나비의 노래를 끝으로 2시간30분에 걸친 투어가 막을 내렸다. 노래가 끝난 오월광장을 빗소리가 가득 채웠고 20명 가까이 되는 일행 중 그 누구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투어를 마치고는 '폴'이라는 인물에 더 마음이 갔다. 시간 여행을 하며 투어를 이끄는 나비는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지만 폴은 다르다. 폴은 개화기 시절 선교사들을 통해 양림동에 깃들었던 한 줄기 빛을, 나아가 역사적 시련을 이겨낸 광주 자체를 의미한다. 모티브로 삼은 인물도 있다. 양림동에서 태어난 항일 투쟁가이자 음악가인 정율성(1914~1976)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 열사(1950~1980)다. 폴의 대사와 여러 상황 속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폴이 들고 다니는 피리도 윤상원 열사가 생전 피리를 잘 불었다는 사실에 착안한 소품이다.

고백하건대 이번 여행이 광주를 제대로 마주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광주 특히 옛 전남도청이 있는 오월광장에 두 발로 디디고 선 느낌은 무척 달랐다.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주검이 발밑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는 느낌. 그 가깝고도 먼 과거는 현재를 지탱하고 있다. 역사를 품은 땅 그리고 그 위에 발붙이고 살아간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드라마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광주를 마주하는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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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의 성지 오월광장. [사진 제공 = 쥬스컴퍼니]

◆ 광주 100년 이야기 버스 = 1930년대에서 시작해 현재를 거쳐 100년 뒤인 2030년 광주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진 공연형 투어다. 투어는 일주일 세 번, 금요일 1회(오후 7시~9시 20분), 토요일 2회(오전 9시 30분~낮 12시 10분, 오후 2시 30분~5시 10분) 진행된다. 1인 1만원. 금요일 야간과 토요일 주간 프로그램은 살짝 다르다. 야간엔 어쿠스틱 기타리스트가 동행해 잔잔한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고 일정 마지막엔 야경 조망 명소엔 뷰폴리를 간다. 금요일엔 출발 장소가 광주종합버스터미널 한 곳뿐이지만 토요일엔 광주송정역에서도 탑승할 수 있다.

[광주광역시 =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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