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NEWS

  • 유럽한글여행지도쇼핑몰
  • 유럽한글여행지도쇼핑몰
[최갑수의 먹고싶GO] 샛강역에서의 단상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여행작가를 하며 국내외를 떠돌았다. 수많은 풍경 앞에 섰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맛보았다. 그 세월 동안 나는 변했고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세상은 결심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사실. 사랑을 믿으면 안 된다지만 그래도 믿을 건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주위 풍경, 주변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것. 소소하지만 거창한 사실들을 깨달아 가며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여행이다.

나는 지금 빌 에번스를 들으며 여의도 샛강역의 어느 편의점에 앉아 기린 이치방 캔맥주를 마시고 있다. 오랫동안 심술을 부리던 영하 날씨가 물러가고 기온이 영상을 회복했다. 주당에게 술 마시기 나쁜 날씨는 없겠냐마는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맥주 마시기 좋은 날씨 같아 주섬주섬 나왔다. 급한 마감을 끝내고 덜 급한 마감은 조금 미루고 오후 세 시 편의점에서 '편맥'을 즐기고 있다.

단 하나의 맥주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기린 이치방이다. 카스도 있고 하이네켄도 있지만 기린 이치방이다. 맥주를 마셨을 때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향이 좋다. 그 향은 '아, 내가 기린 이치방을 마시고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기린 이치방이 가장 맛있다고 고집부리는 건 아니다. 그런 걸로 싸우기 싫다. 평양냉면은 평양냉면이고 함흥냉면은 함흥냉면이다. 나는 다만 기린 이치방이라는 취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기사보기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수요일 오후 세 시에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홀짝이며 빌 에번스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겨울 햇빛은 내 무릎을 따스하게 데워주고 있다. 이렇게 맥주를 마시다 보면 인생에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긴 성공한 인생이든 실패한 인생이든 대낮 편의점에서 맥주나 마시며 시간을 보낼 리는 없지 않는가.

맥주를 따르며 생긴 거품이 스스르 꺼져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거품처럼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즐겨야죠.'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은 수요일 오후 세 시. 어느새 캔맥주 하나를 비웠고 기분이 500㎖만큼 좋아졌다. 다시 작업실로 향한다. 우리를 위로해 주는 건 어떨 땐 사랑보다는 맥주다.

[최갑수 시인·여행작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